아이톨리아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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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이톨리아 동맹은 기원전 7세기부터 테르모스를 종교 중심지로 하는 민족 집단에서 시작되어, 헬레니즘 시대에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한 고대 그리스의 동맹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라미아 전쟁에서 아테네와 연합하여 마케도니아에 대항했으며, 디아도코이 전쟁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 세력에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델포이를 장악하고 암픽티오닉 동맹의 일원이 되었으나, 로마 공화국과의 관계에서 셀레우코스 제국 편에 섰다가 패배하여 종속 동맹국으로 전락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의회, 평의회, 행정관으로 구성된 연방 구조를 가졌으며, 해적 행위로도 악명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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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톨리아 동맹 | |
---|---|
개요 | |
일반 명칭 | 아이톨리아 연맹 |
시대 | 고대 |
존속 기간 | 기원전 4세기 ~ 기원전 188년 |
수도 | 테르몬 (회의 장소) |
공용어 | 도리스 그리스어, 코이네 그리스어 |
종교 | 고대 그리스 종교 |
정치 | |
정부 형태 | 부족 공동체 및 도시의 연맹 |
수장 | 스트라테고스 |
입법부 | 아이톨리아 의회 |
역사 | |
주요 사건 | 로마-셀레우코스 전쟁 이후 로마와의 조약 |
성립 이전 | 아이톨리아 |
소멸 이후 | 로마 시대의 그리스 |
현재 국가 | |
현재 위치 | 그리스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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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아이톨리아 동맹은 기원전 301년경 델포이의 범헬라스 성역을 포함한 파르나소스산을 장악하여 1세기 이상 지배했다. 데메트리우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는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제5차 성전(기원전 289-287년)을 일으켰지만, 에피루스의 피로스의 도움으로 패배하고 마케도니아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아레우스 1세가 이끈 제6차 성전(기원전 281년) 역시 아이톨리아인들에게 격퇴되었고, 기원전 280년에는 트라키스 헤라클레아를 장악하여 테르모필레의 중요한 통행로를 확보했다.[9]
기원전 279년, 아이톨리아 동맹은 그리스를 침공하여 델포이 성역을 위협했던 갈리아인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승리로 그리스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암픽티오닉 동맹에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기원전 232년, 아그론이 이끄는 일리리아인들이 아이톨리아를 공격하여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획득했다.[10] 기원전 229년, 아이톨리아는 파크소스 해전에서 코르키라, 아카이아 동맹과 연합하여 참전했지만, 일리리아인과 아카르나니아 연합에 패배했다. 그 결과, 코르키라인들은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 휘하의 일리리아 주둔군을 도시에 받아들여야 했다.[11]
사회 전쟁 동안 아이톨리아 동맹은 마케도니아 왕국과 대립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의 에피루스 도도나 침공에 대한 보복으로 아이톨리아를 침공, 테르모스를 약탈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 공화국의 첫 그리스 동맹국으로,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과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 편에 섰다. 그러나 로마의 그리스 문제 개입이 심화되자 점차 적대적으로 변했고,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를 지지했다. 기원전 189년 안티오코스 3세의 패배로 주요 동맹국을 잃었고, 로마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고 종속 동맹국이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존속했지만, 실질적인 힘은 약화되어 더 이상 중요한 정치, 군사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2. 1. 초기 역사와 발전
아이톨리아인들은 적어도 기원전 7세기부터 테르모스를 종교적 중심지로 하는 민족 집단으로 인정받았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아이톨리아인들은 초기에 중립을 지켰지만, 고대 아테네인들이 기원전 426년에 아이톨리아를 침공하려 하자 이들을 격퇴하였다.[5]4세기 동안 아이톨리아 동맹은 더 강력한 국가에 수동적인 지원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테베로부터 기원전 367년에 아이올리스를,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로부터 기원전 338년에 나우파크토스를 받았다. 이 세기 어느 시점에 Koinon tōn Aitōlōn(아이톨리아 동맹)이 창설되었지만, 정확한 시기는 불확실하다. 한 가지 제안은 이 동맹이 기원전 367년에 에파미논다스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것이다.[6][7] 다른 의견으로는 이 동맹이 훨씬 늦게,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부상할 무렵에 창설되었다는 주장도 있다.[8] 고고학적 증거는 아이톨리아의 정착지가 이 세기 동안 규모와 복잡성이 커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한 후, 아이톨리아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반대하기 위해 테베인에 합류했고, 패배의 압박으로 동맹은 붕괴되었다. 그 후 10년 동안 재구성된 것으로 보이며, 알렉산드로스 통치 말년에 아이톨리아인들은 그의 뜻에 반하여 오이니아다이를 점령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알렉산드로스 사후 기원전 323년에 발발한 라미아 전쟁에서 안티파트로스에 대항하여 아테네인과 합류했고, 디아도코이 전쟁 동안 마케도니아 세력에 지속적으로 반대하며 기원전 320년, 316/5년, 313년에 마케도니아 침공에 참여했다.
2. 2. 마케도니아와의 갈등과 델포이 장악
아이톨리아인들은 기원전 7세기부터 테르모스를 종교 중심지로 하는 민족 집단이었다. 기원전 4세기 동안 동맹은 테베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게 수동적인 지원을 제공했고, 그 대가로 기원전 367년에 아이올리스를, 기원전 338년에 나우파크토스를 받았다. 이 시기에 Koinon tōn Aitōlōn(아이톨리아 동맹)이 창설되었지만 정확한 시기는 불확실하다.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한 후, 아이톨리아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반대하기 위해 테베인과 합류했지만 패배하여 동맹은 붕괴되었다. 이후 재구성된 동맹은 알렉산드로스 통치 말년에 그의 뜻에 반하여 오이니아다이를 점령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라미아 전쟁에서 안티파트로스에 대항하여 아테네인과 합류했고, 디아도코이 전쟁 동안 마케도니아 세력에 지속적으로 반대했다. 기원전 301년경, 아이톨리아인들은 델포이의 범헬라스 성역을 포함한 파르나소스산을 장악하여 1세기 이상 지배했다. 데메트리우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는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제5차 성전(기원전 289-287년)을 시작했지만, 에피루스의 피로스의 도움으로 패배했다. 제6차 성전(기원전 281년)은 아레우스 1세가 이끌었지만 아이톨리아인들에 의해 격퇴되었고, 기원전 280년에는 트라키스 헤라클레아를 장악하여 테르모필레의 중요한 통행로를 장악하게 되었다.[9]
기원전 279년, 그들은 그리스를 침공하여 델포이의 성역을 위협했던 갈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그리스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암픽티오닉 동맹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
사회 전쟁(기원전 220-217년) 동안 아이톨리아 동맹은 마케도니아 왕국과 싸웠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를 침공하여 테르모스 도시를 약탈했다.
이 동맹은 로마 공화국의 첫 번째 그리스 동맹국이었으며,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5-205년)과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 편에 섰다. 그러나 그리스 문제에 대한 로마의 개입에 점점 더 적대적이 되었고 로마-시리아 전쟁 동안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의 편을 들었다. 기원전 189년 안티오코스 3세의 패배는 동맹의 주요 외국 동맹국을 잃게 했고, 결국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어 종속 동맹국이 되었다.
2. 3. 갈리아 격퇴와 암피크티오니아 동맹 가입
기원전 279년, 아이톨리아 동맹은 그리스를 침공하여 델포이의 성역을 위협했던 갈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9] 이 승리로 아이톨리아는 나머지 그리스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암피크티오니아 동맹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9]2. 4. 일리리아와의 전쟁과 로마와의 동맹
기원전 279년, 아이톨리아 동맹은 그리스를 침공하여 델포이 성역을 위협했던 갈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 승리로 다른 그리스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암픽티오닉 동맹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9]기원전 232년, 아그론이 이끄는 일리리아인들이 아이톨리아를 공격하여 많은 포로와 전리품을 획득했다.[10] 기원전 229년에는 파크소스 해전에서 코르키라 및 아카이아 동맹과 연합하여 참전했지만, 일리리아인과 아카르나니아 연합에 패배했다. 그 결과, 코르키라인들은 파로스의 데메트리우스가 지휘하는 일리리아 주둔군을 도시에 받아들여야 했다.[11]
사회 전쟁(기원전 220-217년) 동안 아이톨리아 동맹은 마케도니아 왕국과 싸웠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아이톨리아인들이 에피루스의 도도나 도시를 침공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아이톨리아를 침공하여 테르모스 도시를 약탈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 공화국의 첫 번째 그리스 동맹국이었으며,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5-205년) 동안 로마 편에 섰다. 또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동안에는 기원전 197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 문제에 대한 로마의 개입에 점차 적대감을 느끼게 되었고, 몇 년 후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반(反)로마 왕인 안티오코스 3세 편에 섰다. 기원전 189년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하면서 동맹은 주요 외국 동맹국을 잃었고, 로마에 대한 지속적인 반대 입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동맹은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고 로마 공화국의 종속 동맹국이 되었다. 비록 이름으로는 계속 존재했지만, 동맹의 힘은 조약으로 인해 약화되었고, 다시는 중요한 정치적 또는 군사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2. 5. 로마와의 갈등과 몰락
아이톨리아 동맹은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15년~기원전 205년)에서 로마 공화국의 첫 번째 그리스 동맹국으로 로마 편에 섰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기원전 200년~기원전 197년)에서는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1] 그러나 그리스 문제에 대한 로마의 개입이 증가하자 점차 로마에 적대적으로 변했다.몇 년 후,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 편에 섰다. 기원전 189년, 안티오코스 3세가 패배하면서 동맹은 주요 동맹국을 잃었고, 로마에 대한 저항을 홀로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고 로마의 종속 동맹국이 되었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계속 존재했지만, 동맹의 힘은 약화되었고, 더 이상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11]
3. 행정 시스템
아이톨리아 동맹은 연방 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공동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외교 정책을 수행했다. 또한 경제를 표준화하여 세금을 부과하고, 통일된 통화와 도량형을 채택했다. 중앙 기록 보관소는 없었을 수 있지만, 동맹을 구성하는 공동체는 상당한 자율성을 누렸다. 때때로 동맹은 회원국이 동맹과 조약을 맺은 국가에 대해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을 막지 못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았다. 동맹 회원들은 일련의 ''텔레''(구획)로 묶였으며, 이는 일종의 행정 및 사법 권한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2]
3. 1. 중앙 행정 기구
아이톨리아 동맹의 중앙 행정 기구는 의회, 평의회, 그리고 여러 관리로 구성되었다.- '''의회 (에클레시아)'''
''에클레시아'' (민회)는 동맹에 속한 모든 공동체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다. 민회는 동맹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기구였지만, 회의가 자주 열리지 않아 실제 권한은 제한적이었다. 민회는 1년에 두 번 열렸는데, 한 번은 가을 분점에 테르모스에서 열리는 테르미카 축제 때였고, 다른 한 번은 봄에 파나에톨리카 축제 때였다. 파나에톨리카 축제는 매년 다른 장소에서 개최되었다. 필요에 따라 임시 회의가 소집되기도 했다.[13]
- '''평의회 (불레 또는 시네드리온)'''
평의회는 ''불라'' 또는 시네드리온으로 불렸는데, 동맹에 속한 각 공동체가 인구수에 비례하여 대표를 선출하여 구성되었다. 기원전 3세기 말에는 평의회 구성원이 약 1,500명에 달했는데, 이는 너무 많은 숫자여서 상시적인 회의 운영이 어려웠다. 평의회 구성원 중 일부는 ''아포클레이토이''(선출된 사람들)라고 불렸으며, 이들은 대사를 보내고 받는 등의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했다.[13]
- '''관리 (아르콘)'''
동맹의 ''아르콘'' (관리)은 매년 테르미카 축제 때 민회에서 선출되었다. 최고 책임자는 ''스트라테고스''(장군)였는데, 군대를 지휘하고 다른 나라와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으며, 민회, 평의회, 아포클레이토이 회의를 주재했다. 스트라테고스는 여러 번 맡을 수 있었지만, 4년의 간격을 두고 재임해야 했다. 원래는 작은 직책이었던 ''히파르코스''(기병대 사령관)는 기원전 260년대 말부터 장군의 부관이 되었으나, 정확한 역할은 명확하지 않다. 세 번째 주요 관리는 ''그람마테우스''(''서기'')였다. 이 세 명의 관리는 동명의 아르콘 (동명의 관리)으로, 동맹의 모든 법령에 연도를 계산하는 공식에 이들의 이름이 들어갔다. 기원전 260년경부터는 재정을 담당하는 7명의 ''타미아이''(재무관)와 군사를 담당하는 7명의 ''에필렉타르코이''(정예 부대 사령관)도 있었다. ''불라르코이''(평의회 사령관)는 평의회 운영 위원회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60년대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2명이었으나, 기원전 3세기 말 동맹 규모가 커지면서 6명 이상으로 늘어났다.[13]
- '''암피크티오니 동맹 대표'''
278년부터 동맹은 암피크티오니 동맹 (델포이 암피크티오니)에 대표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표 수가 점차 늘어나 동맹이 평의회 의석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는 아이톨리아 동맹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260년대부터 암피크티오니 평의회 서기는 항상 아이톨리아인이었다. 이 대표들은 테르미카에서 다른 관리들과 함께 선출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의 상대적 지위는 명확하지 않다.[14]
3. 2. 암피크티오니아 동맹과의 관계
278년부터 아이톨리아 동맹은 암피크티오니 동맹에 대표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맹은 암피크티오니 동맹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아이톨리아는 자신들의 권력을 투사했다.[14] 260년대부터 암피크티오니 평의회의 서기는 항상 아이톨리아인이었다.[14] 이 대표들은 테르미카에서 다른 관리들과 함께 선출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의 상대적인 지위는 명확하지 않다.[14]4. 해적 행위
아이톨리아 동맹은 해적 행위와 강도질로 명성을 얻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폴리비우스의 아이톨리아 동맹 묘사에 아카이아 동맹 편향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많은 현대 역사가들 역시 그의 묘사가 대체로 정당하다고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월뱅크는 아이톨리아인들이 지역의 빈약한 자원을 보충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해적 행위를 이용했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했으며[15], 윌은 단순히 이 혐의의 진실성을 가정한다.[16]
반면, 그레인저는 아이톨리아인들이 필요한 배가 부족했기 때문에 해적 행위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결론 내린다.[17]
참조
[1]
웹사이트
Αἰτωλός - Ancient Greek (LSJ) 👍
https://lsj.gr/wiki/[...]
2020-07-28
[2]
서적
Grainger, 1999
[3]
서적
Hogan, 2008
[4]
서적
West, 1902
[5]
서적
Thucydides 3.94
[6]
웹사이트
ΟΜΗΡΙΚΗ ΕΡΕΥΝΑ: Οι Αιτωλοί από τον Όμηρο μέχρι την ύστερη αρχαιότητα
http://omiriki-ereun[...]
[7]
간행물
A selection of Greek Historical Inscriptions
[8]
서적
The League of the Aetolians
[9]
서적
The politics of plunder : Aitolians and their koinon in the early Hellenistic era, 279-217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10]
서적
Polybius 2.3
[11]
서적
Polybius, 2.10
https://www.perseus.[...]
[12]
서적
The politics of plunder : Aitolians and their koinon in the early Hellenistic era, 279-217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13]
서적
The politics of plunder : Aitolians and their koinon in the early Hellenistic era, 279-217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14]
서적
The politics of plunder : Aitolians and their koinon in the early Hellenistic era, 279-217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
[15]
서적
Walbank, CAH (2) VII 1, 232 and 255
[16]
서적
CAH (2) VII 1, 107
[17]
서적
The League of the Aetolians
[18]
서적
Grainger,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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